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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사당동

동작투데이 편집국 | 기사입력 2010/07/04 [00:32]
사당동 (舍堂洞)
사당동은 큰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1914년 당시 능마을·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하여 사당리라고 부르다가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사당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까치고개[작현(鵲峴), 가추개]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지고 까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당동 281-291번지 일대이다. 현재 은행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고 하여 은행나무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도당(都堂)터
지금의 사당동 사거리 사당지하철역 일대로, 1970년대 초까지도 느티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받들고 해마다
고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느티나무는 뽑히고 도당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화상
(畵像)은 남현동의 관음사(觀音寺)로 옮겨졌다. 최근까지도 이 화상을 모시고 치제(致祭)하였으며, 경비는 각
가구마다 쌀 한말씩을 갹출하였다고 하는데 양이 조금 모자라면 쌀을 이고 오다가 넘어져 꼭 부상을 당하여
감히 양을 속일 수 없었다고 한다.

벌명당
사당동 동래 정씨 문중의 묘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나라에서 묘자리를 정하려고 지관(地官)을 시켜 지형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 지역이 명당임을 알았다. 지관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려 할 때 당시 영의정 자리에 있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것을 알고 다른 곳을 찾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지관은 영의정에게 자기가 동재 기나루를 다 건널 무렵에 그곳을 파보라고 하였다.
 
지관이 동작진(銅雀津)을 다 건넜으리라고 생각되었을 때 땅을 파 보니 커다란 벌들이 수없이 나와 지관에게 날아가 지관을 쏘려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독을 뒤집어 썼으나 벌들이 독에다 침을 놓아 독을 깨트리고 죽었다. 그 뒤 영의정이 죽어 그 자리에 묘를 쓴 뒤 9대를 두고 내리 정승이 나왔다한다
.

삼일(3.1)공원
한국 최조의 여기자인 최은희씨가 3.1운동 당시 여성 참가자는, "직접 일병의 총칼에 대결했던 홍안의 소녀들이 이제는 귀가 멀고, 눈이 어둡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되었으나 나머지 기백을 다시 모아 망각속에서 사그라져 가는 그날의 분노와 저항을 되새기면서 쇠잔한 몸이지만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1967년 4월 15일 동아일보에 "독립공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글을 투고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 하였다.
 
정부는 1967년 5월 15일 공원을 지정하고 1989년부터 1990년까지 공원을 조성,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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